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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국제사

만주에 더 이상 없는 '만주국'은 여전히 살아있다

by 통일동이 2024.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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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제국주의는 육군을 중심으로 만주를 지배했다. 특히 육군은 제멋대로 만주를 침략해 점령한 후, 중국 정부와 전쟁을 벌였다. 모두 일본 중앙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전쟁이었다. 특히 만주에는 일본 육군만의 새로운 나라를 건국해 청의 마지막 황제를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워 만주국을 건국했다. 이 만주국의 제도와 이념이 동아시아 곳곳에 뿌리를 내린다. 

 

 만주국의 출발

  일본은 근대화 이후 동아시아에서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을 설정했다. 특히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팽창정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몽골의 침공을 받은 이후 모스크바 공국으로 출발한 러시아는 주변이 온통 평야 지대였다. 이미 몽골 기병의 침략으로 백여 년 이상을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 러시아는 이후 꾸준히 영토를 확장했다. 적이 침략하느라 지칠 때까지. 청이 약해질 무렵 러시아는 연해주를 빼앗았다. 이제 조선과 일본에까지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당시 세계 질서의 균형을 추구하던 영국은 강력하게 견제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 러시아와 전쟁까지 벌였고 이를 통해 조선을 강제 병합했다. 하지만 일본의 대륙 방어선은 여전히 취약하다는 판단에 1931년 만주에 대한 침략을 단행한다. 만주를 거쳐 내몽골까지 점령한 일본은 곧바로 만주국을 건국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내세운다. 

 만주국 제도와 관료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만주국은 조선과 같은 일본 식민지였으나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국제연맹에서 조사까지 나와 일본이 불법으로 점령했음을 분명히 하면서 만주국의 지위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만주 침략은 당시 일본 육군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허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육군 엘리트들은 만주 침략과 만주국 건설을 곧바로 밀어붙였다. 결국 국제연맹의 만주침략 불허에 따라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육군 엘리트들은 만주국에서 색다른 관료제 실험을 이어갔다. 만주국에는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뿐만 아니라 만주인, 몽골인 외에 여러 소수민족이 살고 있었다. 특히 한국과 일본, 그리고 대만에서 대규모 이민을 일으켜 공동 농업 경작부터 각종 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책 실험을 했다. 일본 정부가 할 수 없었던 실험이었다. 여기서 일한 관료와 군인들 중 한국인과 대만인들은 나중에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만주국의 법과 제도, 그리고 캠페인과 같은 통치 스타일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일본제국주의가 남긴 만주국의 유산

 우리만 봐도 1970년대 농촌사업인 새마을운동부터 복지제도, 법 등에서 만주국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교육이나 군대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공안정책 역시 한국과 대만의 군부독재는 물론, 북한과 중국의 공안시스템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특히 만주국은 일본 육군 중 가장 규모가 큰 관동군 100만 명 이상이 지속해서 주둔했다. 이 또한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와 달리 일본 육군은 1939년 내몽골과 외몽골 국경지대인 할힌골에서 벌어진 몽골군 및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이후 만주가 언제든지 침공당할 수 있다는 위협의식을 느꼈나 보다. 태평양 전쟁으로 병력과 무기가 모자라도 일본 육군은 결코 관동군에서 병력이나 무기를 빼내지 않았다. 

 아시아 국가의 가장 최신 근대화 모델이라 평가받기도 했던 만주국은 그렇게 시스템과 정신으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는 결국 새로운 근대에 자리를 내주고 마는 분위기다. 오히려 중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여전히 그 위력을 떨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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