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도 여전히 이념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그나마 이번 이재명 정부가 중도실용을 표방하면서 올곶은 국가관과 민족관 정도만 표방하는 데 그쳐서 다행이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을 둘러싼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이란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미국의 압박을 이겨내야 하고 이 전쟁으로 빚어진 각종 경제위기를 풀기 위해서는 균형 외교도 상당히 절실한 시점이다.
지금까지 세계사에서 이념이나 종교보다 실용을 선택한 나라들이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결과는 동일했다. 이념이나 종교와 같은 믿음은 중요하고 사회 질서 유지에도 필수적이지만 과도하면 반드시 해를 끼치는 법이다.

전 세계를 지배하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던 영국과 라이벌로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라이벌로 지냈던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영국도 종교 전쟁과 함께 청교도가 왕을 제거하고 독재 정치를 펼치던 시기가 있었다. 바로 크롬웰이 지배하던 시기다. 카톨릭을 영국에 강요하는 국왕이 있었지만 크롬웰이 이끄는 청교도 세력에게 처형당했다. 크롬웰 이후 다시 영국은 왕정을 선택했다. 그러나 절대왕정은 영국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영국은 늘 실용적인 선택을 하곤 했다. 의회의 견제를 받는 입헌군주국이란 체제를 가장 먼저 만든 나라가 영국이다. 정치 체제에서 민주주의는 중요한 이념이었다. 하지만 군주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국은 극단적인 민주주의로 흘러가질 않았다.
식민지를 확장해 가면서 자본주의 최첨단을 달리기도 했지만 영국은 가장 먼저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민주주의 역시 차근차근 남성 노동자에 이어 여성에게까지 투표참정권을 부여했다. 복지제도 역시 군주국이었던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가장 먼저 도입했지만 영국도 차근차근 도입했다.
반면 프랑스는 카톨릭에 진심이었던 군주들이 많았다. 프랑스는 광대한 평원과 온화한 기후로 농업에 적합했다. 중국처럼 식량이 많이 생산되는 부유한 지역이다 보니 점점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변해갔다. 왕은 툭하면 종교전쟁을 일으켰다. 여기에 왕의 권리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이라는 해괴한 이념까지 만들어 추앙했다.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지만 이런 프랑스에 대항해 영국은 다양한 유럽 국가들과 손잡고 싸웠다. 극단적인 프랑스는 이제 전쟁 비용 때문에 세금을 더 걷으려는 삼부회를 소집했다가 혁명을 맞는다. 이번에는 왕의 목을 자르고 공포정치로 시민들마저 학살하는 혁명 정부가 프랑스를 지배한다. 주변국 모두가 군주국이었던 상황에서 프랑스의 일탈은 결국 역풍을 초래한다. 영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프랑스를 침공했다. 프랑스는 코르시카 섬 출신의 나폴레옹이 지휘한 군대로 유럽 곳곳을 휩쓸지만 결국 패배로 귀결됐다. 다시 왕정으로 복귀한 프랑스는 19세기 후반까지 군주정의 지배를 받게 된다.

19세기 중반부터는 프랑스가 점점 영국에 밀리고 이웃나라인 독일에도 밀리는 형국에 빠진다. 해군력은 영국에 밀리고 육군 역시 독일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면서 체면을 구기고 만다. 이후 민주주의 공화정으로 복귀한 프랑스는 몇 차례 헌법 개정을 통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과학기술부터 군사기술까지 세계 1위였던 프랑스는 식민지를 보유했음에도 점점 그 지위가 하락했다. 20세기 들어서는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토 일부가 전선이 됐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에 점령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프랑스는 극단주의에서 벗어난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안정을 되찾았다. 냉전 시에도 일방적으로 미국에 기울지 않고 독자 노선을 추구하며 실용주의로 나아간 결과, 오늘날 유럽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지위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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