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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언론

사대주의의 기원 ④ 임진왜란, 사대주의의 결정적 구실을 제공하다

by 통일동이 2026.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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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사대주의는 열등감과 집권 정당성에 대한 위협 등에 대한 두려움으로 점점 심해져 이는 사대부의 인식에도 남게 됐다. 제미나이 AI 이미지.

 

 전쟁은 많은 걸 바꿔놓는다. 건국 이후 이렇다 할 침략전쟁 없이 평화롭게 200여년을 지낸 조선은 어마어마한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바로 일본의 침략이었다. 이미 사병제도를 혁파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중앙집권제도로의 이행에 성공했지만 그 덕분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 수는 극히 적어진 상태였다. 이로써 고려 대에 잦았던 반란은 예방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외부 침략에는 상당히 취약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시대를 끝장 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여전히 사병을 보유한 일본 전역의 영주들에게 새로운 영토를 약속하며 황당하기 그지없는 명과 인도 정벌 계획을 천명한다. 그리고 조선에는 길을 빌려달라는 명분으로 침략해 들어온 것이다. 조선군은 이미 강력한 전투 경험과 막대한 병력 수를 자랑하는 일본군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더구나 신무기인 조총까지 보유한 일본군은 조선군을 각개 격파하며 한달 남짓 걸려서 부산을 거쳐 한양과 평양성까지 점령하고 다른 부대는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에까지 이른다. 물론, 이는 점과 점을 연결하는 선이어서 보급부터 조선 영토 전체를 점령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이러한 파죽지세의 기세로 인해 조선 조정은 신속하게 명에 원군을 요청했다는 점이다. 명은 당시 만력제가 아무 것도 안하면서 통치에 신경을 쓰지 않던 시기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조선의 일본 침략에 대해서는 신경을 써서 원군 파병을 지시했다고 한다. 야사에는 만력제가 꿈에서 전생에 관우로부터 형님 막내가 지금 위기에 처했는데 왜 돕지 않으시냐고 외쳐서 파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어쨌든 선조는 명의 원군에 남다른 기대를 가졌다. 당시 명이 파견한 이여송 장군은 원래 요동에 살던 고려인의 후손으로 평양성 탈환 이후로는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고 조선 백성 약탈에만 골몰해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선조는 명에 대한 기대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안에서는 사대부를 중심으로 의병이 조직됐고 전라도 지역의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일본군의 보급선을 끊어버린 상태였다. 여기에 굶주림과 학대에 지친 일본군 병사들이 투항하면서 점차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든다. 더구나 강화를 명분으로 이 전쟁 자체를 반대하던 코니시 유키나가와 명의 사절단인 심유경이 각기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황제를 농락하며 협상을 진행해 전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 끝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한 번 정유재란으로 전 병력을 동원해 조선을 공격하지만 처음과 달리 완강한 조선군과 명나라 연합군의 공세에 전쟁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진다. 이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 일본군 장수들은 각기 조선 남부지역에 왜성을 쌓고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결국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서거하면서 전쟁은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만다. 

 

 선조는 자신보다 더 인기가 있는 이순신 장군이나 의병장, 그리고 심지어 아들인 광해군에 위협을 느꼈다. 스스로 이미 서자 출신 임금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던 선조는 전쟁으로 나라마저 잃을 뻔했기에 유독 자신의 집권 정당성이 의심받고 있으리란 두려움에 더욱 더 명에 매달리게 된다. 특히 이 전쟁의 공을 오로지 명에만 돌리는 방식으로 이순신과 의병, 그리고 광해군을 한꺼번에 평가 절하하려고 했다. 이런 선조의 언행으로 인해 명은 조선을 다시 건국하게 해준 은인이라는 뜻인 '재조지은'의 나라로 떠받을게 된다. 이는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의 인식에도 깊이 자리잡게 되고 전쟁 전과 달리 사대주의에 목 매달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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