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은 건국 과정에서 사대주의를 표방했다. 바로 명에 대한 사대주의였다. 이는 조선을 제후국으로 인식하면서 동시에 어떤 나라를 상국으로 받드느냐의 문제였다. 이미 고려 시대부터 큰 나라에 대한 사대는 외교의 기본이 됐다. 얻을 게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점점 지배층의 이념으로 도입된 유교가 큰 나라와 작은 나라의 질서와 예법을 기본으로 가르치고 설파했다. 불교가 또 다른 지배층 이념으로 이를 압도하긴 했지만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 유행처럼 번지던 외교 체제였다.
유목민 또는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들도 나라를 세우면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주변국을 제후국으로 해서 중국대륙 진출에 열을 올렸다. 이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바로 이런 체제로 움직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한족을 지배하려면 그들이 숭배하는 체제를 도입해야 했다. 그 만큼 이미 인구 규모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중국 대륙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지배하려면 당연히 자국 체제로는 불가능했다 유럽에서 게르만이나 바이킹 등 이민족이 로마를 침공하거나 기존 서유럽 국가들을 침략한 후 기독교로 개종한 것도 이런 압도적인 차이 때문이었다.
문화나 인구가 압도적인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해당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념이나 믿음을 활용해야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으니 당연한 결과다.
고려 역시 이러한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이웃민족이 갑작스레 황제국이 되겠다고 선언하면 해당 민족이 무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까지 파악한 후 이를 역이용했다. 서희의 담판 역시 이런 거란의 움직임을 인정하는 듯하면서 오히려 이를 통해 거란이 세운 요나라나 한족의 송나라 모두에게서 이익을 취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몽골 지배 당시에도 고려는 몽골이 중원에 건국한 원과 동아시아 일대를 공동 통치하는 형태로 이득을 취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원에게 양보한 것도 많았다. 공녀와 공물을 바치고 일본 원정에 군함과 군사를 동원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만주 일대를 고려 임금이 지방총독처럼 지배하기도 했고 원나라 황실의 권력 다툼에 끼어들기도 했다. 임금뿐만 아니라 공녀로 원에 바쳐진 딸이나 여동생이 황후가 돼 권력자가 되는 등 원과의 관계를 통해 강력한 지배층의 일원이 된 이들도 권문세족이란 이름으로 나타났다.
고려 말 지배계층은 중국대륙 전체에 대한 정보가 풍부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요동 일대인 철령 이북의 땅이 고려의 것으로 넘어오게 된다. 이자춘과 이성계란 고려 출신 몽골 지방세력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중 이 지역 전체를 고려에 바친 것이다. 이들은 함경도 일대에 자리잡은 세력으로 쌍성총관부는 함경도와 평안북도 요동 등 지금의 중국 동북부 일대까지 쌍성총관부 다스리던 호족 세력이었다. 기존 사학계에서는 쌍성총관부를 강원도 이북 일부로만 가리키는데 철령이라는 지명과 주변 지명 등이 나온 중국 사서를 보면 만주 일대로 보인다. 이는 나중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고 어쨌든 이런 식으로 얻은 땅에 대해 훗날 명나라가 소유권을 주장하게 된다.
1차 요동정벌의 시작이다. 당시 고려의 우왕과 최영 장군은 어렵사리 다시 얻은 이 일대 땅을 다시 요구하자 요동 정벌을 주장한다. 쌍성총관부를 지키면 될 것을 굳이 요동 정벌까지 계획한 것은 바로 명이 대륙을 통해 이 지역에 발을 디디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고구려 때부터 요동은 중국 대륙에서 출발한 육군의 침공과 진군을 막기 위한 천혜의 요소였다. 요하(랴오허)를 따라 평행하게 산맥이 형성돼 있어 대륙에서 넘어오는 군대를 막기 좋고 주변에 농사 지을 땅도 풍부한 편이라 경제적인 측면까지 고려하면 경영하기 좋은 지역이었다.
더구나 요동반도 끝자락에 있는 대련은 19세기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영역 다툼을 할 정도로 서해와 태평양 그리고 동중국해 진출까지 고려하면 무역이나 무력 거점으로나 중요한 지역이다.
그러나 이성계 장군 등은 고려가 국력을 고려하지 않고 요동 정벌을 추진하는 것에 분노했다. 이미 원나라가 약해졌던 시기 요동을 공격해 점령했다가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철수해야 했던 뼈아픈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유명한 사불가론을 들어 위화도 회군이란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여기서 사불가론 중 첫 번째가 대국을 치는 것은 잘못됐다는 사대주의 원칙이었다.
이성계가 마침내 왕 위에 오르고 고려가 조선으로 바뀐 후 건국 주요 이념과 체제를 설계한 삼봉 정도전은 꾸준히 군사력 정비에 힘쓴다. 사대주의를 이용할 줄 알았을뿐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들처럼 사대주의를 신앙으로 믿었던 인물이 아니었던 정도전은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가 친명사대주의를 표방한 조선에 과도한 요구를 하거나 강짜를 부리자 요동 공격을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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