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미와 친중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분열로 이어지게 할까.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사대주의가 정치는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도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고 하면 어찌됐든 그 사람을 일반인들과는 구별해서 보기 시작한다. 미국 유명 대학의 한 교수가 한 말이라면 많은 한국인들이 권위를 인정하기도 한다. 하물며 미국이 요구하면 웬만하면 들어줘야 한다는 모습마저 보인다. 이 사대주의의 기원을 찾아서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이후로 사대주의는 이념과 연결돼 있다. 조선 이전의 고려 시대까지 실용적인 모습을 보이던 지배층은 조선 중기 이후 급격하게 이념편향의 사대주의 비중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거란과 여진, 송나라를 두고 고려는 황제국을 표방하면서도 사대의 예를 이들 나라에 갖추면서 이익이 될 만한 것들을 취했다. 건국 초 만주와 북중국 일대는 거란, 남중국 일대는 송이 차지하고 있었다. 무력은 거란이 강했고 송은 문물이나 경제에서 강점을 보이던 나라다. 이미 국제무역을 활발히 펼치던 고려는 최초 송과 가까이 지냈다. 태조 왕건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와 고구려 영역을 지배하던 거란을 적대시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일종의 정무 감각에 따른 것일 수 있다. 발해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이라는 동족의식과 함께 고구려는 물론 발해마저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실제 태조 왕건이 거란을 침공하겠다고 계획을 세우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거란이 친선의 선물로 보낸 낙타를 굶겨죽였을뿐이다. 오히려 민생 안정과 여전히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역에 대한 안정에 힘썼다.

이런 정무 감각은 고려시대 내내 이어진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장기전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깨달은 고려는 사대의 예를 표하고 실리를 얻어 그동안의 영토를 보전받았다. 이미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가 나서서 외교를 통해 오히려 강동 6주를 확보해 압록강을 경계로 거란의 새로운 침입에 대비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한 바 있다. 2차 침입 때 강감찬 장군이 거란을 격퇴한 이후 고려가 새로운 영토 확보를 위해 압록강을 넘어가질 않았다. 사신을 보내 사대를 표하는 대신 얻을 걸 얻었다. 사대가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은 것이다.
다만 잦은 노략질과 침입으로 고려 북부 지역민들을 괴롭히는 여진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했다. 도둑이 들었으니 나라를 지키고 이들의 본거지를 찾아 공격한 셈이다. 아예 연해주 일대의 여진을 격퇴하고 동북 9성을 쌓아 영토를 확장하려 시도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잦은 전투로 인한 전쟁 비용이 상승해 민생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영토 확장을 위한 민간인 이주가 사실상 어렵자 포기했다. 그 대신 여진의 사대를 받아들였다. 이후 여진은 이 지역을 바탕으로 금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국이라 칭한 후, 거란을 무너뜨리고 역시 중국 북부지역까지 점령한 후 송과 전쟁을 벌여 마침내 양자강 이북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금은 스스로 받들여 모시던 고려에 사대를 요구했고 고려는 실리적인 판단을 앞세워 이를 수용해 전쟁을 피했다.

하지만 그 이후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고려는 몽골과의 외교관계에서는 삐걱대는 모습을 보이고 만다. 정당성이 결여된 무신정권은 기존 고려 황제와 다른 상황이었기에 민심을 살피면서도 실리보다 자존심을 앞세운 셈이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정당성이 결여된 집권세력은 결국 나라를 전쟁으로 모는 경향이 있다. 협상은 커녕 백성에게는 결사항전을 외치던 무신정권이 몽골군이 해전에 약하다는 점을 간파하고는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고려의 나머지 지역은 몽골의 침략을 받아 황폐해진다. 수십년 간 이어진 이런 상황은 고려를 쇄약하게 만들었다. 무신정권이 종말을 맞은 뒤에야 고려는 몽골이 중원을 평정하기 전 세운 원나라와 화친을 맺게 된다.
이런 악순환은 결국 고려의 모순을 극대화시키고 몽골 편에 서는 이들이 왕보다 더 권력이나 영향력이 큰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원나라에 공녀로 갔다가 황후가 된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 일당이 대표적이다. 이 때부터 사대주의가 싹텄다고도 볼 수 있다. 나라님이나 우리 민족이 아니라 외세와 결탁하는 것이 확실한 처세 목표로 자리잡게 된 셈이다.
원은 200년도 못가서 중국 땅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후 주원장이 건국한 명이 중국 대륙을 차지한다. 고려는 이 때부터 친원 기득권 문벌귀족과 친명 신진 사대부 간 새로운 사대주의 양상으로 심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친명 신진 사대부가 승리하며 아예 고려를 폐하고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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