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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언론

이해찬, 영원한 민주청년...한 시대의 인물이 퇴청하다!

by 통일동이 2026.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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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은 전직 국무총리로 기억될 것이다.

 

 지난 25일 별세한 이해찬은 민주청년으로서의 삶으로 기억된다. 강단 있는 그의 모습을 처음 접한 것은 1989년 5공 청문회서였다. 당시 대통령까지 지낸 신군부 지도자 전두환을 두고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고 일갈하는 국회의원 이해찬의 날선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덕수중과 용산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한 이해찬은 1971년 고교를 졸업했으니 재수를 하지 않았으면 이 해에 대학 새내기가 됐을 것이다. 1970년대는 유신과의 전쟁을 선포한 학생운동의 시대였다. 대학 시절 선배들 이야기로는 이 때까지가 그나마 낭만적인 학생운동, 낭만적인 대학문화의 시대였다고 한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창립 멤버였던 이해찬 전 총리

 

 박정희 정권이 이제 유신헌법 개정으로 종신 대통령이 되겠다는 욕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해다. 여당인 공화당 정치세력들과도 마찰을 빚을 만큼 독재에 대한 반발은 정권 내부에서조차 나왔던 시절이다. 이미 학생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이해찬은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김근태의 학생운동 후배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민주당에 영입되면서 동교동계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늘 민주당의 주류와 함께했다.

이해찬 전 총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평화민주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교육부 장관으로 수시 모집 등 성적 위주의 입시정책을 개혁해 이해찬 세대라는 당시 입시제도의 혜택을 본 세대를 칭할 때 이름이 붙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책임총리가 돼서 국정을 직접 이끌기도 했다. 당시 야당 정치인들로부터도 인정 받을 만큼 똑똑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날카롭고 날이 선 품성은 바뀌지 않았다. 여러 사람을 품는 정치인이라기보다 참모 스타일로 일을 똑부러지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민주당 진영에서는 전략가로서 사랑받았고 상대편 진영에서는 상당한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정치 은퇴 이후에도 친문, 친명 등 민주당의 새로운 대통령 후보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호위했다. 그렇기에 민주당뿐만 아니라 민주당 여러 지지세력으로부터도 사랑받았다. 민주당을 중도 보수라 규정했던 이해찬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와도 친했는데 합리적인 진보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운동권 세력 중 민족해방 계열로부터도 폭넓고 깊은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다. 마지막까지 민주평화통일위원회 수석부의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업무로 베트남 출장을 갔다가 심근경색으로 별세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대한민국에 큰 일을 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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