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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언론

[이승만 다시보기 3] 야만의 시대를 부활시키려는가?

by 통일동이 2024.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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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을 부활시키려는 시도에는 악의적 의도가 숨어있다.

 

 일부 보수 정치세력과 언론이 띄우려고 하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이미 역사 검증이 종료된 인물이다. 새로운 연구나 사료 발견 등이 이뤄질 수 있겠지만 큰 틀에서 대세가 흔들릴 수 없다. 

 

 그런데도 이승만과 그의 나라 세우기를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인 양 과장하고 왜곡하려는 이들의 의도는 무엇일까. 일단 이승만 정부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봤던 인물과 세력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일차 윤곽은 나온다. 

 

 이승만이 돌아오기 전 한반도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 등 자치기구가 곳곳에 생겨났으며 치안과 질서 유지에 나선 상태였다. 북쪽에 소련군이 들어오고 남쪽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각기 군정을 시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세력은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정치 세력이었다. 공산주의보다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은 한반도 안에서 이미 변절에 나선 기존 민족주의 세력들과 달리 가난한 대다수 국민들 편에 서 있었던 데다 일제 말기에도 끝까지 독립투쟁에 나섰다는 명분까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도 일찌감치 미군정이 실시되던 남한에서 자리를 잡고자 한다. 하지만 그가 그나마 손을 잡을 수 있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자신이 대통령까지 역임했으나 탄핵당한 상해 임시정부와도 껄끄러운 관계였고 공산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와도 늘 선을 그어온 이승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45년 11월 오랜 시간 해외에서 활발한 대일본 무장 투쟁에 매진해 온 김구 등 상해 임시정부 세력이 귀국했다. 

 

 미 군정이 시작된 이후 친일 세력은 눈치를 보다 친미 세력으로 둔갑했다. 이들에게 민족 세력이라는 강력한 후광이 필요했다. 그렇게 손을 잡은 것이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여기에 백범 김구 등 상해 임시정부 세력과 민족주의계 인사들과도 손을 잡는다. 특히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모든 정치 세력은 반신탁통치 운동에 나서게 된다. 워낙 복잡한 문제지만 어쨌든, 이 반탁운동이 좌익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을 갈라놓는 계기가 된다. 정치 테러가 빈발하고 좌익이든 우익이든 가리지 않고 주요 인사들이 총을 맞고 암살당하는 불미스러운 일까지 벌어진다.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였다. 

 

 남과 북이 각기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후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다.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후 반민특위를 무산시키고 자신의 정치 반대파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며 탄압하고 숙청한다. 그러면서 친일 세력은 친미 반공 정권의 주축이 되고 권력과 부를 모두 차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한 상황은 계속된다. 곳곳에서 무장 반란이 일어나고 남과 북의 국경선 근처에서는 끊임없이 충돌이 발생한다. 특히 해방 후 모든 국민이 원하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토지개혁이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합하면서 강제로 빼앗은 토지부터 친일지주가 누리던 토지 기득권까지 어쨌든, 다시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여론이 드높았다. 이미 북한은 정부 수립 이전부터 이러한 토지 개혁을 완료한 상태였다. 전쟁 발발 직전 결국 대한민국 역시 토지개혁에 들어가면서 대만과 함께 아시아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토지 개혁을 성공한 나라가 됐다. 여기에 전쟁으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모두 사회에서 철저히 금기시 되면서 친일 기득권 세력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승만은 전쟁 이후에도 장기 집권에 나섰으며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선거로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이 또한 정치 야만의 시대라 할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야만은 바로 학살이었다. 전쟁이 나면서 이승만 정부는 기존 좌익 세력 중 대한민국 정부의 품 안에 들어온 이들을 포함해 각 지역에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일반인들에게 보리 등 식량을 줘가면서 가입시킨 보도연맹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적의 편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이유였지만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승만 정부는 북한의 침공을 받고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0년 9월 서울로 돌아온 후,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던 국민들을 대상으로 부역자 색출에 나서는 등 전국 곳곳에서 역시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봉암 등 정치인에 대한 사법살인, 민주화를 요구하는 어린 학생을 고문 치사하는 등 그야말로 국민을 상대로 한 야만에 정치 지도자로서 책임이 상당히 컸다. 

 

 그런 이승만을 다시 조명하고 그의 업적을 과실보다 더 극대화하는 행위야말로 이승만의 집권 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기득권을 누리게 된 이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행태임이 틀림없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0451

 

"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 특명에 의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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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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