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데없는 이승만 타령에 코미디 같은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분노를 유발하기까지 하는 이승만 띄워주기에 보수 세력들이 똘똘 뭉치기까지 했다. 생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봐도 우스운 상황이다.
이승만은 해방 당시 이승만 박사라 불렸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땄기 때문이다. 박사 학위를 받은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너무 흔치 않은 일이었던 까닭이다. 이런 명성 덕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이승만은 외교를 통한 독립을 주장했고 실천했다. 특히 무장투쟁과 관련해서는 확고하게 반대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에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로 인해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비난을 사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임에도 임시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으면서도 단 한 차례도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상하이에 가질 않았다. 특히 미국 하와이에서는 독립운동가 박용만과 갈등을 일으켰는데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하와이에 들어온 일본 군함에 대한 테러를 기획하던 박용만 무리를 미국 경찰에 신고해버린 것이다.
미국 안에서의 활동 역시 놀라울 따름이다. 앞서 미국에서 동포들을 조직해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도산 안창호의 외손자가 직접 증언한 내용을 보면 경악스럽다.
‘도산 안창호’ 외손자 “이승만이 영예로운 독립운동가인가… 역사적 평가에 결함” (daum.net)
‘도산 안창호’ 외손자 “이승만이 영예로운 독립운동가인가… 역사적 평가에 결함”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CGV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무대 인사에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 장관, 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 김덕영 감독(사진 왼쪽부터)이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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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자신의 미국 내 조직을 만들고 이권 추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폭력을 일삼고 한인조직 안 갈등과 내분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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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의 이승만 보고서.jpg : 클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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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이승만은 미국을 등에 업었다. 일제 강점기 내내 미국을 활동무대로 삼은 이승만으로서는 소중한 기회를 얻은 셈이다. 더구나 자신의 독립운동, 미국 대학 박사 학위 등을 내세웠지만 역사에서 이승만의 독립 의지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2차 세계대전 전인 1930년대부터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투쟁에 깊은 인상을 받은 당시 중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했다. 중국 공산당 역시 조선인들의 참여와 도움 속에 일본군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한국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국권 강탈 이후 해외에서 처절한 무장투쟁과 임시정부 등 다양한 노력을 인정받은 결과, 영국 처칠 총리의 뜨뜻미지근한 반응 속에서도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미국, 영국, 중국 지도자 간 합의가 나올 수 있었다. 여기에 이승만이 숟가락을 얹는다는 건 솔직히 억지에 가깝다.

해방 이후 마침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 이승만은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모조리 공산주의로 몰기 시작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국가보안법도 만들었다. 6.25 전쟁 전의 일이다. 제주 4.3사건, 여순반란사건. 보도연맹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등 전쟁 전부터 전쟁 와중에 이르기까지 이승만 정부 치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학살당했다. 전쟁 역시 초기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부터 '런승만'이란 별명을 얻게 한 시민들을 속이는 내용의 방송 녹음 후 도주한 사건 등 지도자로서 빵점인 행태를 벌였다.
민주주의를 표방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은 미국 군정에 협조한 대가로 살아남은 친일 관료와 경찰, 그리고 군대까지 포섭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했다. 권력은 당연히 나눌 수 없다. 이승만이 온전히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경쟁자들을 제거해야 한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의 정당성이나 정치 입지 등에서 뛰어난 명망가들이 그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필요하면 손을 잡았다가도 틀어지면 멀리했다. 백범 김구가 대표적이다. 백범 김구는 끝내 누가 배후인지 모를 안두희에게 총을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전쟁 이후에도 독재를 펴가면서 이승만은 정적을 제거한 경우가 있다. 바로 조봉암이다.
사실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로 수립한 대한민국이 전쟁 전 정정이 불안했던 게 해소되고 전쟁 이후 북한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울 수 있었던 계기가 토지개혁이었다. 그 토지개혁을 완수한 것이 당시 1대 농림부 장관이었던 조봉암이었다. 그런 조봉암이 전쟁 이후 진보당 당수로 이승만의 강력한 경쟁자가 된 후, 그의 약점인 일제강점기 당시 공산당 활동을 근거로 간첩죄를 뒤집어 씌워 사형시켰다. 대표적인 사법살인으로 기록된 사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국민을 향한 공권력의 폭력과 학살을 방조하거나 묵인했다는 점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삼청교육대, 그리고 12.12 사태에서 보여준 잔인한 면모의 전두환을 능가했다. <서울의 봄>으로 전두환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 이들에게 이승만을 내세운 일부 보수세력의 정치 공작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비록 <건국전쟁>을 보진 않았어도 여러 리뷰를 통해 보니 멀고 먼 옛날 이승만이 대통령이던 시절 교과서에나 나옴직한 내용들로 그를 찬양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1990년대부터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며 조선일보가 주도한 이념논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보수세력에게는 백범 김구나 몽양 여운형 등 실제 정의의 편에 섰던 민족 지도자들보다 미국 유명대학 박사 출신에 개신교도라는 배경이 더 끌렸던 걸까. 더구나 그는 해방 이후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고 적극 기용했으니 보수세력의 뿌리에는 은혜로운 존재였기 때문일까.
스스로 하야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국민들의 버림을 받았던 이승만을 한국인들은 잘 기억하고 있다. 역사 안에서 이미 평가가 끝난 자를 다시 끌어내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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