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시 보는 국제사

미-이스라엘 전쟁, 과연 누가 처칠이고 누가 히틀러일까?

by 통일동이 2026. 4. 20.
728x90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은 현대전쟁의 역사와 인식을 바꿨다. 제미나이 AI 이미지.

 

1차 세계대전은 유럽 여러 나라에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 일단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죽어나가는 기술로 인한 대량살상이 가능해진 첫 번째 전쟁이었다. 특히 참호전은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정신적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기관총과 독가스, 그리고 비행기와 탱크 등 신무기들이 등장하면서 전쟁의 양상도 달라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수십만이 금세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 뼈아팠다. 전후 유럽 지도자들은 최대한 새로운 전쟁은 피하려고 했다. 

 

문제는 1차 세계대전의 가혹한 마무리가 낳은 대가였다. 패전국인 독일을 상대로 한 잔인한 전쟁배상금부터가 문제를 낳았다. 승전국들은 독일에 관용을 전혀 베풀지 않았고 독일 경제는 파산 직전까지 갔다. 신흥 제조업 강국으로 19세기 내내 유럽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였던 독일과 독일인들은 아돌프 히틀러를 선거로 선택했다. 

 

그런 히틀러가 1차 세계대전으로 빼앗긴 독일 영토와 함께 독일인들이 사는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 총리 네빌 체엄벌린은 1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잘 인식하고 있던 인물로 그런 독일과 뮌헨협정을 통해 체코의 일부 땅을 독일에 양위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협정을 통해 전쟁 방지 노력은 히틀러에게 영국이나 프랑스가 실제로는 다른 유럽 국가에 대한 독일의 침략을 막을 생각이나 능력이 없다는 오판으로 이어졌다. 이후 독일은 체코를 점령한 데 이어 폴란드와 노르웨이를 공격했다. 

 

체엄벌린과 같은 보수당 정치인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은 체엄벌린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바로 비타협 정책이었다. 사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체엄벌린은 국내 정치 및 개혁을 위해 최대한 전쟁에서 거리를 두고자 했을뿐이다. 더구나 영국은 전쟁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상태였고 체엄벌린은 총리 시절 영국 공군 강화에 매진하면서 나중에 독일의 영국 공습 당시 버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어쨌든 처칠은 영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강력한 단결과 독일에 맞설 불굴의 의지를 강조했다. 이후 영국은 미국과 함께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독일 및 이탈리아군과 맞서 싸우게 됐다.

1945년 2월13일에서 15일까지 영국과 미국 공군은 독일 드레스덴 시를 네 차례나 폭격해 민간인 2만5000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미나이 AI 이미지.

역사를 이렇게 되돌아보면 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체엄벌린보다 처칠이 더 높은 평가를 받곤 한다. 그 대신 전쟁을 강력히 주창했던 처칠이나 히틀러는 전쟁의 승패를 통해 평가받는 듯하다. 이긴 처칠은 높은 평가를, 패한 히틀러는 최악의 빌런이 됐다. 사실 처칠 역시 독일 드레스덴 폭격 등으로 수많은 독일 민간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은 어떨까. 이 전쟁의 승패 결과에 따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무즈타바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세 사람 모두 현재 자국민은 물론, 인근 지역과 전 세계를 고통에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셋 모두 동맹국은 물론 그 어떤 나라로부터도 공개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어찌보면 모두가 패자인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728x90
반응형